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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식 교육에 대한 오해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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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잉글리씨드 작성일18-10-15 13:11 조회17,0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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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식 교육에 대한 오해 벗어나기]

‘암기식 교육’이라는 말은 주입식 교육이라는 말과 함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기본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애를 쓰며 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상식처럼 퍼지고 있다. 아예 암기는 필요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마저 생겨나고 있다. 정말 암기는 필요 없는 것일까?

1. 인터넷 검색 학습과 선험지식의 관계

동일한 정보를 접하거나, 동일한 시간동안 정보를 검색하게 하더라도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의 량에 따라 학습량이 달라진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이 배우게 되고, 아는 것이 적은 사람은 더 적게 배우게 된다. 이를 학습에서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라고 부른다. “모르는 것은 손에 쥐어줘도 모른다.”는 우리 속담은 이러한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인지과학에 "전문가-초보자 학습(expert-novice studies)" 분야가 있는데, 이 분야의 선도적인 학자로는 노벨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 Herbert A. Simon)과 공동 연구자인 질 라킨(Jill Larkin)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연구(Larkin, Simon and others, 1980. Hirsch, 2000: 2에서 재인용)에 따르면 이미 관련 주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문가는 사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빨리 검색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빨리 배운다. 반면에 기초지식이 없는 초심자는 주어진 시간 안에 필요한 것을 학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한 번에 3, 4개의 새로운 것만을 소화시킬 수 있는 작업 기억의 한계 때문이다. 검색 중인 대부분의 요소를 알고 있는 전문가는 새로 찾은 한 두 개의 추가 지식에만 초점을 맞추면 되고, 이를 선험지식에 쉽게 통합할 수 있다. 바둑이나 체스 고수는 몇 초만 훑어보아도 대부분 복기할 수 있지만 초보자는 그리 할 수 없다. 초보자가 익숙하지 않은 바둑돌의 위치를 모두 기억하는 것은 뇌의 작업기억 한계 때문에 불가능하다. 반면 고수는 이미 눈에 익은 바둑이나 체스 형세를 바탕으로 몇 가지 특징만 기억하면 되므로 복기가 가능한 것이다(Chase & Simon, 1973. Hirsch, 2000: 2에서 재인용).

2. 암기의 의미

암기란 배운(學) 후에 익혀(習)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익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할 때에는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어떤 지식이나 기능이 저절로 떠오르는 상태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뇌가 하는 ‘생각이라는 활동’은 필요한 정보를 뇌 안에서 자체 검색하여 이를 바탕으로 주어진 사태를 분석·비판하고, 나아가 시공을 넘나드는 창조적 생각을 펼쳐나가는 활동이다. 만일 저장되어 있는 정보가 별로 많지 않거나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검색이 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생각의 과정이 자주 끊기게 될 것이다. 많은 단어와 문장이 뇌에 암기되어 있는 우리말로 생각을 전개할 때에는 생각이 물 흐르듯이 이어지지만 외국어로 생각을 전개하려고 하면 어휘력의 한계 때문에 생각이 자주 끊기는 것과 같다. 암기한다는 영어 표현 중에 ‘learn by heart’가 있다. 암기하는 것을 왜 가슴으로 배운다고 표현했을까? 가슴으로 배운다는 것은 머리로 분석하고 이해하여 따지며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필요한 순간에 저절로 떠오르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암기는 머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통해서도 한다. 운동선수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활동을 의식이 아니라 거의 무의식 상태 즉, ‘적응무의식 상태’(Wilson, 2004)에서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반복해서 학습하는 것은 몸이 암기를 하도록 하는 활동이다. 타인의 지식, 작품, 행동을 적응무의식상태에서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암기의 주요 목적이다. 모방은 무언가를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지름길이다. 방황하던 어린 피카소가 매일 미술관에 들러 종일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실력을 키워 나갔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일화이다.

3. 고급 역량과 암기의 관계

우리 뇌와 몸은 반복을 통해 습득한 지식과 기능을 개선하고 변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은 이를 ‘훈수효과’라고 부른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이 두는 바둑에서는 쉽게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듯이, 학습하는 과정에서 남의 것을 모방하다보면 저절로 고쳐야 할 점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암기는 분석·비판·창의력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은 암기의 의미와 효력을 오해하거나, 우리 뇌의 변형 능력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과거 학교가 암기식 교육을 시켰다고 하지만 그 암기식 교육을 받았던 우리 선배들이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뇌가 가지고 있는 변형 능력 덕분이다.

뇌가 가지고 있는 변형 능력 중의 하나는 수천 개의 사실적 지식이 저장되면 이것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정리된 인지도식인 스키마(schema)를 형성하는 능력이다. 달리 설명하면 우리 뇌는 저장된 사실 지식들을 연결시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나름의 틀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새로운 사실적 지식을 접할 때 이 틀을 활용해 이해하고 저장한다. 결과적으로 이미 많은 지식을 저장하고 있는 사람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틀을 이미 가지고 있고, 이를 활용해 새로운 지식을 훨씬 쉽게 학습할 수 있다(Johnson-Laird, 1983; Anderson and Pearson, 1984. Christodoulou, 2014: 48에서 재인용). 이 때문에 동일한 시간동안 동일한 것을 가르치더라도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이 배우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나타난다. “사실적 지식을 학습하는 목적은 단지 하나의 사실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스키마(즉,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렌즈 혹은 틀)를 만들 때 사용되는 수백 개의 사실들을 배우는 것이다”(Christodoulou, 2014: 49).

물론 가지고 있는 스키마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다보니 확증편향에 빠지는 문제도 생긴다. 가령 사실적 지식은 역량 개발에 방해가 된다는 유형의 스키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위의 주장이 별로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 않기 때문에 장기 기억에 저장되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반면, 사실적 지식이 역량 개발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유형의 스키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위의 주장이 쉽게 이해되고, 결과적으로 관련 지식을 더 많이 축적하게 될 것이다.

4. 암기식 교육이 비판받는 이유와 나아갈 방향

여러 설명에도 불구하고 암기식 교육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동안 시행되어온 교육의 한계 때문이다. 우리 뇌는 특성상 이해를 해야 쉽게 암기할 수 있다. 그런데 원리를 이해시키지 못한 채 무작정 외우라고 하면 많은 학생들은 외우기 힘들어 한다. 이렇게 무작정 외우라고 하는 것을 주입식 교육이라고 한다. 이러한 지식이나 사실은 겨우 외웠다고 하더라도 그 기억이 오래가지 못하고 필요할 때 꺼내 쓰기도 어렵다. 또한 해당 지식이나 기능을 익혀야 하는 이유에 공감하지 못하면 우리 몸과 마음은 이를 자신의 것으로 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주입식 교육을 암기식 교육이라고 부르며 비판해왔다(박남기, 2016).

지식과 기능의 특성과 필요성을 이해시키지 못한 채 억지로 무작정 외우도록 하는 교육법을 ‘단순암기식 교육법’이라고 부른다면 이 단순암기식 교육법이 나쁜 것이지 암기시키는 활동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암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가 퍼지면서 학교에서는 외우는 활동을 시키지 않고, 학생들도 점차 외우는 것을 힘들어 하고 있다.

요새 초중등학교 현장에서 실시되는 수행평가는 주로 배움(學)을 돕고 측정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익히는 것(習)은 학생 몫이라 생각한다면 학생들에게 익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익힌 정도를 측정하는 평가를 통해 익힘 활동도 도와야 할 것이다. 익힘(習) 활동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활동(學)보다 더 힘들고 재미가 없다. 하지만 반복을 통해 머리와 몸이 완벽하게 암기해야만 그 것을 활용할 수도 있고, 변형시킬 수도 있다. 배움만 강조하는 사이에 익힘 활동에 필요한 끈기와 인내를 잃어가는 학생이 늘고 있다. 이는 결국 학습하지 않거나 궁극적으로 학습역량을 갖추지 못한 학생의 증가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단순암기식 교육의 폐단을 들어 암기마저 문제시 하는 것은 유아 욕조의 물이 더럽다며 버리라고 했더니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글: 박남기 교수(광주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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